“연필을 깎아오게.”
서슬 퍼런 장인의 굳은 얼굴에서 터져 나올 수많은 질문과 그래도 혹 모를 열댓 가지 덕
담들을 예상한 그였지만 정말이지 이런 말이 나올 줄은 상상도 못 한 터였다. 집 안에 들
어설 때부터 한두 방울 맺히던 식은땀이 일거에 식는 기분이었다. 긴장이 풀려서가 아니
라 전혀 새로운 긴장으로 들어서기 위해 몸이 이미 다른 방식으로 적응하기 시작한 것일
까? 아니면 비장하고도 서늘한 장인의 기운이 그에게로 전해진 탓일지도 모를 일이었다.
“내 말 못 들었나? 내 딸과 결혼하려면 연필 열두 자루를 성심성의를 다해 깎아 오게. 그
것도 손으로 직접 깎아야 하네. 결혼 승낙 여부는 그다음에 얘기할 걸세.”
그는 잠시 멍한 표정으로 있다가 함께 무릎을 꿇고 앉아 있는 옆의 민주를 바라보았다.
어이없기는 매한가지라는 표정이었으나 민주는 빠르게 고개를 젓는 제스처를 놓치지 않
았다. 일단 알았다고 대답하라는 신호임이 분명했다. 물론 지금이 무언가를 생각하고 고
민할 상황이 아니라는 것쯤은 그도 잘 알았다.
“네. 잘 알겠습니다. 저… 그런데….”
미래의 장인이 될지도 모를 어르신의 눈가가 살짝 삐쳐 올라갔다.
“언제까지 깎아 오면 되겠습니까?”
대답은 빨랐다.
“스스로 완벽하다고 여길 때까지.”
“아… 네….”
그리고 장인은 서슴없이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쾅 소리가 나도록 문을 닫고 방을 나갔다.
다행인 것은 미래의 아내 될 사람과 장모 될 두 사람만큼은 이 상황의 황당함에 대해 함
께 공감해주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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