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에게는 몽블랑 제품이 4개 있다. 그중에는 MontblancEditionSirHenryTate도 한 자루 있다. 하지만 손에 항상 들
려 있는 펜은 4만 5,000원짜리 라미 만년필이다. 몽블랑이 좋지 않아서 사용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한번 들고 나갔다가
잃어버린 경험이 있어서다. 그래서 4개의 몽블랑 만년필과 볼펜은 항상 책상 위에 꽂혀 있게 되었다.
컴퓨터에서 (글을 쓸 때가 아니라) 칠 때는 내가 좋아하는 특정 서체가 있다. 왠지 이 서체가 나의 필체인 것 같아서 많이
이용하지만 글로 쓰면 이런 서체가 나오지 않는다. 필체에서 뭔가 독특한 느낌을 만들려면 볼펜이 아니라 만년필의 아날
로그적 느낌이 필요하다.
글을 손으로 쓸 때는 수많은 감각과 근육이 필요하다. 먼저 머리에 생각이 생겨 마음으로 넘어가고 그것이 팔 근육을 통
해 손으로 전달되는데 이때 시간은 생각에 따라서 1초에서 하루까지 걸리는 것도 있다. 일단 그러고 나면 생각이 내 촉수
가 되어 버린 만년필 촉에서 마치 거미가 거미줄을 뽑아내듯 술술 풀려 나가는 그림들을 볼 수 있다.
사람의 지문이 저마다 다른 것처럼 같은 필체를 가지는 경우도 극히 드물다고 한다. 그래서 범인을 잡기 위한 여러 개의
검사 중 지문검사만큼 필체검사도 유용하게 쓰인다. 나만의 필체를 만들기 위해서 사용한 4만 5,000원짜리 라미 사파
리 만년필은 정확히 나를 이해하고 있다. 나 또한 이 만년필의 촉을 완전히 이해하고 있다. 거의 지문과 같은 나의 특이점
을 만드는 라미는 나의 반려브랜드다.
Liberal
Window
PDF EDITION VOL.22下인문학적 브랜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