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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OL.29 · 지면p.115–116

기억

어느 날 아침, 다른 때와 다름없이 7시에 눈을 뜬 세이치는 뭔가 허전한 느낌이 들었다. 그 전날 마셨던

커피잔도, 의자에 걸쳐둔 웃옷도 집 안 풍경 어디 하나 변한 것이 없는데, 그는 전날과 분명히 달라진

자신을 느꼈다. ‘이건 뭐지? 내가 꿈을 잘못 꾼 건가?’ 대수롭지 않게 여긴 그는 여느 때와 다름없이 출

근 준비를 시작했다. 그가 5년째 몸담고 있는 엔진(ENJIN Inc.). 일본에서는 알짜배기 경영과 크리

에이티브한 광고로 꽤 알려져 있다. 그는 이 회사에 입사 전, 일본에 있는 한국 대기업에서 일하다 자

신의 능력을 펼칠 수 있는 회사를 찾기 위해 퇴사를 결심했다. 엔진 입사를 결심한 결정적인 계기는 기

업 사이트(www.en-jin.jp) 때문이었다. 구인 공고에 나와 있는 사이트를 따라 들어가니 원인의 얼

굴 화석 이미지와 기업 정신에 대한 글, 가로세로 6cm가량의 검은 원 하나가 페이지 위에 덩그러니 놓

여있다. 페이지를 이리저리 움직이다 검은 원에 커서를 대보니, 갑자기 빨려 들어가는 모션으로 바뀌

며 그 안에서 바나나가 튀어나왔다. 호기심이 발동한 그는 바나나 끝을 잡고 그 검은 구멍을 따라 들

어갔다. 그러자 모드가 바뀌면서 전혀 다른 세상이 펼쳐졌다. 몽환적인 전통 음악이 흐르고 원인들이

바나나를 잡기 위해 각축전을 벌이는 모습 뒤로 인류의 역사가 천천히 파노라마처럼 흘러갔다. 넋 놓

고 한동안 멍하니 그 플래시를 바라보았다. 지금의 나는 왜, 무엇을 위해 이 자리에 있는 걸까. 문득 그

런 의문이 들었다. 이곳에서는 뭔가 자신이 모르는 것을 배울 수 있을 것 같은 예감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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